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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가진 두 사람이 같은 현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문수와 강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고를 견디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문수는 아역 시절 스타였던 동생 연수를 잃고, 사고 당시의 기억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해리성 기억상실인 문수가 사고 현장 근처에 가거나 고층 빌딩에 올라가는 것조차 못 하는 장면들이 연기적으로 과장된 게 아니라 실제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으로 읽혔습니다.
강두는 반대입니다. 그는 기억을 너무 선명하게 갖고 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 소년 최성제가 그 후 어떻게 됐는지까지 알고 있고, 그 죄책감이 12년 내내 그를 짓눌러왔습니다. 아버지는 청유건설 하청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강두 본인은 다리에 흉터를 안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거칠고 냉소적이지만, 돌봐야 할 숙희를 위해 빚을 지고, 동생 재형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거리를 두는 모습에서 그 안의 외로움이 비어져 나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런 복합적인 인물은 작가가 인물을 설계할 때 내면 논리를 얼마나 촘촘하게 짜느냐에 따라 설득력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강두는 그 균형이 잘 잡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치는 청유건설 현장, 그리고 문수가 웅덩이에 빠져 트라우마 반응으로 굳어버렸을 때 강두가 건져내는 장면은 단순한 남주의 영웅 서사가 아닙니다. 강두가 "왜 가만히 있었냐"고 물었을 때 문수가 "죽고 싶었던 건 아니다"라고 답하는 대사 한 줄이, 그 장면 전체를 살려냈다고 생각합니다. 트라우마 반응은 의지로 제어되지 않습니다.
- 문수: 사고 당시 기억 소실, 고층 공포, 동생 연수를 잃은 상실감과 가족 해체
- 강두: 아버지 사망, 다리 흉터, 최성제에 대한 죄책감, 12년째 쌓인 분노
- 두 사람의 공통점: 상처를 혼자 삭이는 방식으로 버텨왔다는 것
건설비리라는 소재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이유
12년 전 붕괴 사고가 발생한 바로 그 자리에 바이오타운이라는 신규 개발 프로젝트가 들어선다는 설정 자체가, 과거가 지워지지 않고 계속 현재 위로 올라온다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공간으로 구현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학연·지연으로 얽힌 감리 비리가 현장 재점검 과정에서 드러나는 장면, 유택이 트렌치크 공법(지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굴착면을 지지하는 공법으로, 연약 지반에서 붕괴를 막는 핵심 기술입니다)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장면은 실제 한국 건설 현장에서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문수가 잘못된 도면 수정을 요구하거나 보수 작업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장면도 모형 제작사 출신 예비 건축가라는 그의 이력과 맞물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 건설사고 통계에 따르면 건설 현장 사망사고의 상당수는 설계·감리 단계의 부실에서 비롯된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주원이라는 인물도 여기서 흥미롭습니다. 그는 12년 전 사고의 설계 책임을 진 채 목숨을 끊은 건축사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떠안은 책임이 실제로 온당한 것이었는지 진실을 파헤치려는 목적으로 강두를 현장 감시 스파이로 활용하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책임을 혼자 짊어지고 사라지는 방식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주원이라는 인물이 오롯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느낀 건, 이 드라마가 누가 옳고 그른지를 쉽게 결론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유진이 청유건설 대외협력팀 팀장이자 유택의 동생이면서 주원의 전 여자친구라는 관계 설정도, 선악 구도를 흐리게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건설비리 고발 드라마가 아니라, 그 비리 안에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얽혀 있는 이야기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자료에서도 건설 현장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책임 소재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바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그냥 사랑하는 사이 드라마 장르가 뭔가요? 로맨스인가요 스릴러인가요?
A. 로맨스와 사회 드라마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두 주인공의 감정선이 중심이지만, 건설비리와 12년 전 붕괴 사고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 함께 전개됩니다. 스릴러처럼 긴장감이 강하지는 않지만,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방식이 꽤 촘촘합니다.
Q. 강두와 문수가 과거에 연결된다는 걸 언제 알 수 있나요?
A. 초반부터 조금씩 단서가 쌓입니다. 강두가 문수를 처음 구해준 이유, 다리의 흉터, 그리고 '불독 맨션' 노래라는 연결 고리가 차례로 등장하면서 12년 전 강두가 문수를 구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문수가 그 기억을 잃었다는 점이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긴장을 오래 유지시켜 줍니다.
Q. 전개가 느린 편인가요?
A. 중반부에는 전개가 다소 천천히 흘러가는 구간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직접 봤을 때, 그 느린 구간이 인물들의 감정선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빠른 전개를 선호하신다면 초반이 좀 답답할 수 있지만, 중후반에 감정이 터지는 장면들이 그 시간 덕분에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결론
보고 나서 오래 남은 문장이 있습니다. 강두가 문수에게 "모르는 게 약인지 아는 게 힘인지"를 물었을 때입니다. 이 드라마는 그 질문에 어느 쪽이라고 답하지 않습니다. 기억을 잃고 살아온 문수와, 기억을 너무 선명하게 안고 살아온 강두 모두 같은 무게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상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게 시간이라고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 난 뒤에는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시간이 아니라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훨씬 크게 와닿았습니다. 트라우마 치유의 핵심 요인으로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를 꼽는 심리학 연구들과도 일치하는 방향입니다. 여기서 사회적 지지란 고립되지 않고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회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심리적 자원을 의미합니다. 건설 현장과 붕괴 사고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끝에 남는 것이 사람의 온기라면 한 번쯤 볼 만한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