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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 '윤선아'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은오는 양양에서 '윤선아'라는 가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미스터리 설정인 줄 알았는데, 직접 겪어보니, 정확히는 끝까지 보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절박한 자기 부정이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은오는 면접 현장에서 민수의 불륜을 목격했고, 그 때문에 입사가 취소됩니다. '평범하다'는 이유로 모든 걸 잃은 충격이 그녀를 양양으로 내몰았고, 그곳에서 그녀는 '이은오'라는 이름을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이걸 드라마 용어로 설명하자면 일종의 페르소나(persona) 교체인데, 여기서 페르소나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인에게 보여주는 자아의 가면을 의미합니다.은오의 경우는 가면을 쓴 게 아니라 원래 얼굴을 지우려 한 것에 가까웠던것 같습니다.
재원을 만난 것도 그 맥락입니다. 서핑, 캠핑카, 충동적인 운전면허 수업 '윤선아'로서는 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습니다. 재원이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었을 때 은오가 이별을 결심한 건, 그 질문이 '이은오'로 돌아오라는 신호처럼 들렸기 때문일 겁니다. 경험상 이런 류의 감정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막상 이야기로 풀어지니 오히려 생생하게 와닿았습니다.
- 입사 취소 → 양양 도피 → '윤선아' 가명 생활
- 재원과의 연애는 '윤선아'라는 페르소나 위에서 시작
- 재원의 질문 한 마디가 이별의 방아쇠로 작용
- '이은오'로 돌아오는 과정 자체가 드라마의 진짜 주제
카메라 도난 - 이별을 포장한 가장 독특한 장치
카메라 도난이라는 장치를 처음 들었을 때 좀 황당했습니다. "이별 기념으로 카메라를 훔쳐요?"라고 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설정이 쌓이면 쌓일수록 꽤 영리한 선택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은오가 카메라를 가져간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재원이 경준의 사촌 형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자신의 사진이 담긴 카메라를 그냥 넘겨줄 수 없었던 겁니다. 또 하나는 은오 본인의 말대로 "모든 걸 잊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잊으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냉장고 안에 필름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게, 이 캐릭터의 모순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 보면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건들의 배열 방식을 의미합니다.카메라는 '분리와 재연결'의 맥거핀(macguffin)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맥거핀이란 이야기 전개에 동력을 주는 소품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장치를 뜻합니다. 재원이 카메라를 찾는 척하며 결국 은오를 찾게 되는 흐름, 은오가 필름을 현상하면서 재원이 자신을 위해 커플 보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장면이 모든 게 맥거핀을 중심으로 감정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설계됐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특히 좋았던 건 경찰서 신분 확인 씬이었습니다. 재원이 은오의 신분증을 보고 자신이 알던 '선아'가 '이은오'임을 확인하는 순간—그 충격이 단순히 "거짓말을 들켰다"가 아니라 "내가 사랑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혼란으로 이어지는 게 꽤 현실적으로 그려졌습니다. 로코에서 이 정도 감정 밀도를 경험하기는 쉽지 않아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재회 - "연애라는 단어부터 함께 알아가자"는 말의 무게
재원과 은오의 재회 과정은 사실 꽤 지난합니다. 청계천을 매주 찾아가는 재원, 경찰서 도난 신고 단골이 된 재원, 환영이 보인다고 정신과를 찾아간 재원을 보면서 "이 남자 좀 심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집착이 밉지 않게 그려진 건 재원이 은오를 "완성된 여자로서 좋아한 게 아니라, 엉망인 채로 좋아했다"는 게 행동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은오 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지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도 먼저 연락하지 않고, 캐리어를 들고 버스를 탔다가 결국 재원 집 앞에서 눈을 뜨는 장면—이게 제 경험상 이런 감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꽤 정확하게 포착한 것 같았습니다. 이성으로는 정리가 됐는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그 어긋남 말입니다.
옥상 파티에서 재원이 은오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며 건네는 대사"'연애'라는 단어부터 함께 알아가자"는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문장입니다. 이른바 관계 재정의(relationship redefinition)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기존 관계의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재설정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보통 로코에서 이런 장면은 "다시 사귀자"로 끝나는데, 여기선 "처음부터 다시 알아가자"라는 표현을 썼다는 게 달랐습니다. 은오가 '이은오'로서 맺는 첫 번째 연애로 설계된 결말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자신을 찾는 것이 재원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중요하다"고 선언했던 은오가, 결국 재원의 고백으로 해소되는 결말은 자아 찾기 서사가 로맨스 완성을 위한 장치로 소비된 느낌을 줍니다.
그럼에도 인터뷰 형식이라는 구성 방식은 꽤 영리하게 작동했습니다. 각 인물이 인터뷰어의 질문에 답하는 구조가 속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됐고, 드라마 속 현재와 과거가 자연스럽게 교차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결론
로맨틱 코미디인 줄 알고 가볍게 시작했는데, 다 보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은오가 '윤선아'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다가 천천히 다시 '이은오'로 돌아오는 과정, 그게 이 드라마의 진짜 알맹이였다. 카메라 도난이라는 다소 엉뚱한 사건이 그 흐름을 열어준다는 게 신기했다. 누군가는 물건을 잃어버려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결국 자기 자신을 되찾는 이야기로 이어지다니.
재원과 은오의 관계를 보면서 좋았던 건, 사랑이 어떤 완성된 감정으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연애라는 단어부터 함께 알아가자"는 대사를 들었을 때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이미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것도 다시 배워야 하는 거였다. 특히 페르소나 뒤에 숨어 지낸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 대사 하나로 이 드라마가 하려던 말이 뭔지 확실히 느껴졌다.
다만 아쉬운 점도 솔직히 있었다. 자아를 회복하는 서사가 결국 로맨스의 완성으로 수렴되는 구조라, 은오의 이야기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여정이었다기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과정처럼 읽히는 순간들이 있었다. 자아 찾기라는 무거운 주제를 로맨스라는 가벼운 틀 안에 담으려다 보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타협 같기도 했다.
인터뷰 형식의 옴니버스 구성도 처음엔 낯설었다. 여러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인터뷰처럼 엮어가는 방식이 신선하긴 한데, 몰입이 자꾸 끊기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재원과 은오, 이 두 사람의 서사만 따라가면 충분히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느껴졌다. 굳이 모든 에피소드를 같은 무게로 볼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얼굴과 진짜 나 사이의 거리에 대한 것이었다. 은오처럼 다른 이름 뒤에 숨어본 적은 없어도, 누구나 조금씩은 자기가 아닌 모습으로 사람을 만난 경험이 있을 테니까. 그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 결국 사랑이라는 걸, 이 드라마는 꽤 담백하게 보여줬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if9lkykMP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