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고 싶은 일을 붙들고 수십 년을 버텼는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성공해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요. 저는 그 정도 규모는 아니었지만, 무언가가 잘 안 풀릴 때 억지로 붙들고 있는 건지 진짜 좋아서 하는 건지 헷갈렸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 때문인지, 20년 무명 감독의 이야기가 유독 마음에 걸렸습니다.
20년 무명 감독, 그 끝에서 시나리오를 다시 쓰다
드라마 속 황동만은 40대 무직 남성입니다. 영화감독이라는 직함이 있지만, 그 직함은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탈락의 이유가 될 뿐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감독'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권위이고,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현실이 드라마적 과장이 아니라 실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황동만은 감정 상태를 단체 채팅방에 매일 올리며 존재감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를 무시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황동만이 안쓰럽기도 했고, 동시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 방식이 사람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황동만의 전환점은 시나리오 개발(script development) 과정에서 시작됩니다. 시나리오 개발이란 초고(draft)를 쓴 이후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다듬는 작업으로, 영화 제작에서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 중 가장 긴 시간을 요구하는 공정입니다. 프리프로덕션이란 실제 촬영 전 기획, 캐스팅, 예산 확보 등을 준비하는 전 단계를 말합니다.
비평가 은하는 황동만의 시나리오에 대해 주인공과 대립 구도가 흐릿하고 내러티브 파워(narrative power)가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파워란 이야기가 관객을 끌어당기는 힘, 즉 장면과 캐릭터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감정을 이끌어 내는 구조적 힘을 뜻합니다. 황동만은 이 혹평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시나리오를 고쳐나갑니다. 국내 영화 제작 현장에서 시나리오 퇴고 횟수는 평균 7~10회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과정이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한다는 점은 업계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됩니다.
황동만이 보여주는 태도 변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단순히 '열심히 한다'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피하거나 울면서 참는 대신, 정면으로 나서겠다고 선언합니다. 무가치한 상황 속에서도 이야기를 건져 올리겠다는 그 태도가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황동만이 이 과정에서 거친 핵심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알바 면접 탈락 등 현실적 굴욕을 겪으며 자신의 위치를 직시
- 비평가 은하의 혹평을 수용해 시나리오를 구조적으로 재작성
- 기존 소속사 파인에서 독립해 홀로 제작을 추진
- 사채까지 동원하며 촬영 현장을 지켜내는 집념을 보임
- 결국 제48회 한국 영화상 신인 감독상 수상으로 20년 무명을 끝냄

잘 안 되는 시간이 사실은 쌓이고 있었다
저도 한 가지 일에 빠졌을 때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루하고, 잘 안 되는 것 같고, 솔직히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하게 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 시점부터 일이 달라졌습니다. 하루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오늘의 아쉬운 점을 혼자 복기하다 보면, 몸은 피곤한데 내일이 빨리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감각이 너무 신기해서 당시에 한참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분명 힘든 일인데, 왜 더 하고 싶은가. 지금 돌이켜보면 관심이 생기니까 보이는 것이 많아지고, 보이는 것이 많아지니 재미가 따라온 것 같습니다.
황동만이 "사람을 감정 덩어리로 인식한다"고 표현하는 장면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혔습니다. 이건 단순한 공감 능력이 아니라, 캐릭터 구축(character building)에서 말하는 내면 동기 파악 능력입니다. 캐릭터 구축이란 인물의 외적 행동뿐 아니라 내면의 결핍과 욕망을 설계해 관객이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황동만이 20년 동안 실패하면서도 감독을 놓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처럼 무명 감독은 수없이 많습니다. 성공한 감독들만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니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 한국 영화계에 등록된 감독 지망생과 독립 영화 제작자 수는 2023년 기준 수천 명에 달합니다. 감독이라는 직업은 본인의 시선과 감각으로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만큼, 성공의 기준이 모호하고 시장의 반응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점이 가장 잔인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오랫동안 알 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황동만과 은하가 필명 '영실'로 계약을 진행하며 공동 작업을 이어가는 구조도 현실적으로 흥미로웠습니다. 크레딧(credit), 즉 작품에서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는 방식은 저작권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이 부분에서 생기는 갈등은 창작 업계에서 실제로도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마무리하면서 드는 생각은 이겁니다. 황동만의 이야기가 감동적인 이유는 결국 그가 이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시당하면서도 도망가지 않았고, 혹평을 받으면서도 시나리오를 고쳤고, 사채를 쓰면서도 촬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들이 쌓여서 신인 감독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겁니다. 어떤 분야든 지금 잘 안 풀리는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이 낭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나중에 선명하게 차이를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