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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봉투 하나에서 시작된 이야기
처음 이 드라마를 볼 때는 솔직히 가볍게 웃고 넘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 온 미리가 이사업체와 실랑이를 벌이고, 시어머니와 시누이 앞에서 눈치를 보고,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언니들과 술 한잔하다가 아줌마 어벤져스를 결성하는 흐름까지는 동네 수다 같은 분위기였으니까요. 주차 빌런 에피소드도 그랬습니다. 남의 차를 막아놓고 사과도 안 하던 사람이 당했던 그대로 되갚음을 받는 장면은 속이 시원했고, 아르바이트생들을 괴롭히던 식당 운영까지 드러나 단속반이 출동하는 대목에서는 통쾌함이 꽤 컸습니다.
그런데 쓰레기 봉투 하나가 분위기를 바꿔놓습니다. 단지에 불법 투기된 봉투가 나왔는데 하필 현장에 있던 미리가 분녀 회장에게 쓰레기 세례를 받아요. 억울하니까 진범을 직접 찾겠다고 나서는데, 이 장면에서 저는 피식 웃었습니다. 이게 무슨 탐정이야 싶었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버린 장난감 같은 사소한 물건으로 봉투 주인을 좁혀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이 아니라 아, 그렇네 하고 따라가게 되는 흐름이었어요.
그러다 봉투에서 나온 머리카락이 실종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해정의 것으로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미리와 소희가 원석의 집에 들어가 그릇에 남겨진 해정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진짜 긴장했습니다. 쓰레기봉투로 시작한 소동이 감금된 사람을 구하는 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해정이 원석의 자상함에 속았다가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됐다는 설명도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감금 사건이 낯선 괴물이 저지르는 일이 아니라 다정해 보이던 이웃에게서 벌어진다는 점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무서웠어요.
보는 내내 같은 단지에 사는 사람들을 얼마나 모르고 사는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는 이웃이 누구인지, 옆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잖아요. 이 드라마는 그 무관심의 틈을 아줌마들의 오지랖이 메우는 이야기였습니다. 평소엔 귀찮고 참견 많은 것처럼 보이던 오지랖이 누군가를 살리는 힘이 된다는 설정이 좋았습니다.
미리가 20년 넘게 안고 산 죄책감
이 드라마가 단순한 통쾌극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22년 전 리본맨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입니다. 미리는 친구 지은이 사건을 당하던 날 무서워서 도망쳤고, 그 일을 20년 넘게 마음에 얹고 살아왔습니다. 상담사 도진을 찾아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죄책감을 갖고 살았다고 털어놓는 장면은 보면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어요. 밝고 당찬 모습으로 아파트 단지를 누비던 사람이 사실은 그 기억 때문에 계속 사건 해결에 매달려온 거라는 게 이해가 됐습니다. 미리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범인을 쫓는지, 왜 모르는 사람의 일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지가 한꺼번에 설명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리본맨의 정체가 아파트 경비원 김연덕이었다는 반전도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앞서 잡힌 태훈은 모방범에 가까웠고, 진짜는 오래전부터 가까이에서 단지 사정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었죠. 경비원이 가짜 리본맨까지 만들어 자신을 숨겼다는 설정은 솔직히 조금 많이 얹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특수부대 출신에 아파트 경비로 잠입해 오랜 시간 정체를 감춘다는 건 현실에서는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니까요. 그래도 지은 엄마의 유서와 녹음기, 그리고 사라진 일기장 앞장 같은 단서들이 하나씩 이어지는 과정은 보는 재미가 충분했습니다.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경비원이 미리에게 던진 말이었습니다. 친구를 죽인 건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가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이요. 범인이 하는 말이니 궤변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리가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한참 따라다녔습니다. 범인을 잡았다고 해서 20년 넘게 안고 온 죄책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텐데, 드라마는 그 부분을 길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요. 통쾌한 결말 뒤에 미리의 마음이 어떻게 정리됐는지 조금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이 팀이 단순한 동네 모임이 아니라는 건 끝까지 느껴졌습니다. 아픈 아들을 두고도 사건에 뛰어드는 소희, 말없이 문을 부수고 위기 속에서 몸을 던지는 경자, 정보를 모으고 판을 짜는 지연까지 각자 맡은 역할이 분명했어요. 특히 소희의 아들이 심장 이식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전화가 오는 장면은 반가웠는데, 그 뒤가 끝까지 분명하지 않아 마음 한쪽이 걸렸습니다.
통쾌함 뒤에 남은 불편한 구석들
재미있게 봤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먼저 에피소드마다 해결이 너무 시원하게 끝난다는 점입니다. 경자의 괴력 덕분에 일진들도 깡패들도 단번에 정리되다 보니, 위기가 와도 크게 불안하지 않았어요.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어차피 경자가 해결해 주겠지 하는 믿음이 생기니 긴장감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리본맨과 모방범, 가짜 리본맨, 경비원이 한꺼번에 얽히면서 누가 누구인지 따라가기 벅찬 대목도 있었고요. 바바리맨 에피소드에서 동대표가 범인으로 밝혀지는 부분도 다소 급하게 지나갔습니다.
현실과의 거리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경찰이 놓친 사건을 동네 아줌마들이 해결한다는 구도는 통쾌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에요. 미리가 녹음기를 들고 혼자 범인을 만나러 가는 선택이나, 폐가에 몰래 나간 아이를 어른들이 뒤늦게 쫓아가는 전개는 긴장을 만들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습니다. 증거를 모으는 방식도 너무 쉽게 허락되는 느낌이었어요. 현실이었다면 훨씬 많은 벽에 부딪혔을 텐데, 드라마 속에서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필요한 단서가 나타나 주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드라마를 좋게 기억합니다. 웃음과 무게를 한 작품 안에서 섞어내는 균형이 좋았거든요. 주차 빌런 같은 가벼운 이야기로 정을 붙이게 한 다음, 감금과 연쇄 사건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로 천천히 끌고 가는 방식이 자연스러웠어요. 시월드 장면이나 남편 승호의 카페 소동처럼 현실적인 생활 이야기가 사건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어서 숨 쉴 틈도 있었고요.
보고 나서 제일 크게 남은 생각은 거창한 영웅이 없어도 곁에 있는 사람들 덕분에 버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리 혼자였다면 20년 전 기억을 끝내 마주하지 못했을 테고, 경자와 지연, 소희가 있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갈 수 있었으니까요. 완벽하게 정리된 드라마는 아니지만, 웃다가 어느새 숙연해지는 경험은 쉽게 얻기 어렵습니다. 가볍게 시작해서 의외로 묵직한 이야기를 찾는 분이라면 한 번쯤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리가 그 말을 들었을 때의 표정이 아직도 가끔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