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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이라는 설정, 뻔하지 않았던 이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결박당해 발견된 여자. 이름도, 과거도 전부 사라진 상태입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기억상실 로맨스의 출발선처럼 보였고, 제가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다른 건, 기억을 잃은 이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서울중앙지검 반부패 수사부 검사로서의 수사 활동과 직결된다는 점입니다.
고지원은 주시장과 백상일 회장의 택지 개발 비리를 쫓다가 증거물인 시계를 빼앗기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악역에게 제거 대상이 된 검사라는 설정이 로맨스에 긴장감을 제대로 얹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장태하라는 인물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는 국가대표 복싱 선수 출신이었지만, 할머니 병원비 문제로 백상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폭 생활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할머니가 친할머니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는데, 그 대목에서 저는 태하라는 사람이 얼마나 외롭게 살아왔는지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조폭이 됐어도 첫사랑 앞에서 진심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 뻔할 수 있는 설정인데도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태하가 고지원을 지키려 했던 동기도 단순한 호감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시절과 8년 전 일본 고베에서 이미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고, 태하는 고등학교 시절 대회에서 도움 받았던 은혜를 갚겠다는 약속을 스스로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저로서는 가장 설득력 있었습니다. 의리와 첫사랑이 뒤섞인 동기가, 로맨스를 억지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이어서 가는 것 같았어요.
- 고지원 = 서울중앙지검 반부패 수사부 검사, 택지 개발 비리 수사 중 기억상실
- 장태하 = 국가대표 복싱 선수 출신, 병원비 문제로 조폭 입문
- 태하가 고지원을 지키는 이유 = 호감 + 과거 은혜에 대한 약속
사진의 의미, 단순한 서사 장치가 아니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소재는 사진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서사를 연결하는 장치라고 가볍게 넘겼는데, 보고 나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은세의 잃어버린 기억도, 태하의 첫사랑도, 효진과의 관계도, 심지어 백상일이 태하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되는 순간까지 전부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됩니다.
드라마에서 은세가 SNS 속 사진을 보고 자신이 고은세가 아니라 고지원임을 깨닫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꽤 설득력 있는 연출이었습니다.
사진이 운명을 바꾼다는 이 드라마의 시선은 저에게도 묻는 바가 있었습니다.사람과 함께한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적었고, 그게 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실제로 저는 같이 있던 사람들과의 사진을 더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는건 사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말이 아닌 것 같았네요. 이건 제가 이 드라마를 통해 얻은 가장 소소하면서도 구체적인 변화입니다.
효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은세는 검사가 된 후 친구 효진을 무시했고, 효진은 그 미움 때문에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좀 뜨끔했습니다. 자기가 최악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은세의 표정, 나도 저런 순간이 있었나 싶어서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드라마가 로맨스를 넘어서 인간관계의 복잡함까지 짚어줄 때, 그게 가장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반전 결말, 극적이지만 아쉬움이 남는 이유
백상길이 이송 중 탈출해 태하의 할머니 집으로 숨어들고, 앨범 속 사진을 통해 태하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는 반전은 꽤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태하를 짓밟고 조직으로 끌어들인 악인이 실은 친아버지였다는 설정, 드라마적으로는 분명 강력한 한 방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저는 좀 갈립니다. 반전 결말인가,라는 생각은 했습니다.즉 예상을 뒤엎는 결말로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은 잘 쓰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지만, 잘못 쓰면 개연성보다 충격 효과만 노린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 드라마의 경우, 백상길 서사를 마지막에 갑자기 뒤집은 것이 개연성보다는 반전 자체를 위한 선택처럼 보인다는 의견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백상길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말도 마음이 좀 무거웠습니다. 태하 입장에서는 평생 몰랐던 진실이 그냥 덮여버리는 셈인데, 그게 과연 태하를 위한 결말인지 아니면 극작가의 편의를 위한 선택인지 물음표가 남습니다. 태하는 정말 끝까지 자신이 백상길의 아들임을 몰랐던 걸까, 아니면 어렴풋이 눈치는 챘던 걸까 하는 궁금증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홍관장이 과거 백상길의 스승이었다는 설정, 곽치연이 백회장 측 사람이었다는 반전, 이런 인물 간의 얽힘은 세계가 좁게 느껴지면서도 촘촘하다는 인상을 줬습니다. 사진이라는 소재로 이 모든 인물의 운명을 엮어낸 건, 비판 포인트가 있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결론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처음 봤을 땐 그냥 흔한 기억상실 로맨스겠거니 했는데, 다 보고 나니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 작품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인물들이 하나같이 어딘가 아프고 결핍이 있다는 점이었다. 태하는 은혜를 갚으려다 진짜 사랑을 하게 됐고, 은세는 기억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되짚어보게 됐다. 특히 효진과의 관계에서 고은새가 과거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장면은, 완벽한 주인공이 아니라 실수하고 반성하는 사람을 보여줘서 오히려 더 진짜 같았다.
아쉬운 점도 분명 있다. 백상길이 태하의 친아버지라는 반전은 충격적이긴 했지만 조금 급하게 던져진 느낌이었고, 고은새의 기억이 폭발 장면 하나로 한꺼번에 돌아오는 전개도 감정을 따라가기엔 벅찼다. 그래도 이런 아쉬움들이 작품 전체를 깎아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이 드라마에서 진짜 가져온 건 사진에 대한 생각이다. 사진이 그냥 남기는 게 아니라, 잊고 싶지 않은 마음을 붙잡아두는 방법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래서 이제는 풍경 대신 사람을 더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보고 나서 내 일상의 작은 습관 하나를 바꾸게 만든 작품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Lp9LDh6Enu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