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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슬립이라는 익숙한 틀, 그런데 요리가 다르게 썼다
일반적으로 타임슬립 드라마는 현대인이 과거에서 현대 지식을 활용해 위기를 돌파하는 공식을 따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도 그 공식을 기대했는데, 실제로 봤더니 방향이 조금 달랐습니다.
주인공 지형은 프랑스 요리대회 우승 경력을 가진 현직 셰프로, 비행 중 계기 이상으로 조선 시대에 불시착합니다. 이후 연이군의 사냥터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궁중 요리사로 배정되는 흐름인데, 여기서 요리가 단순한 '먹방 장치'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이 제가 직접 보며 느낀 가장 큰 차이였습니다.
예를 들어 지형이 조선 시대 고기를 부드럽게 조리하기 위해 활용한 수비드 기법이 등장합니다. 지형이 이 기법을 조선 환경에 맞게 변형해서 쓰는 장면은 캐릭터의 전문성을 설명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봐서 느낀 건, 요리 장면 하나하나가 지형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위기 때마다 말이 아니라 칼과 불로 자신을 증명하는 구조가 꽤 설득력 있었습니다.
- 수비드 기법으로 조선 시대 육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
- 비프 부르기뇽, 슈니첼 등 서양 조리법을 궁중 식재료에 접목
- 된장 파스타, 삼계탕 등 전통 식재료를 셰프의 감각으로 재구성
- 압력솥(장춘생 제작)을 활용한 오골계 삼계탕으로 명나라와의 요리 경합 승리
연이군이라는 인물, 폭군 서사의 개연성 문제
폭군 캐릭터는 사극에서 흔히 소비되는 유형입니다. 그런데 연이군은 처음에 그 전형처럼 보였다가, 어머니(폐비)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드러나면서 달리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입체 악역 설정은 뒷받침이 약하면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지는데, 이 드라마는 적어도 초중반까지는 개연성 있게 쌓아올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강수건이라는 최측근이 사실은 반정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구조, 그리고 연이군의 복수심이 오히려 강수건에게 이용당하는 아이러니는 잘 짜인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반정이 터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지않나 싶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연이군이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배되는 흐름이 지나치게 압축되어 있어서, 그동안 쌓아온 감정선이 충분히 소화되기 전에 결말로 달려가는 느낌이어서 이 부분은 아쉬움이 남았어요.
강수건의 악역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잘 만들어진 악역은 자신의 논리가 있어야 몰입이 깊어지는데, 강수건은 후반부로 갈수록 '권력욕으로 움직이는 평면 악역'으로 소비된 경향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설명이 있었으면 드라마 전체의 밀도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명나라 사신단 요리 경합, 통쾌하지만 국뽕 논란도 있다
드라마 중반부의 핵심인 명나라 사신단과의 요리 경합은 제가 직접 봤을 때 긴장감과 통쾌함이 가장 잘 살아있던 파트였습니다. 환관 우건이 경합을 핑계로 공녀와 인삼 채굴권 같은 과도한 요구를 들이미는 장면은 외교 갈등을 요리 대결로 치환한 구조였는데, 이 설정이 꽤 흥미롭게 작동했습니다.
3차 경합에서 지형이 장춘생이 제작한 압력솥으로 오골계 삼계탕을 완성해 28대 27로 승리하는 장면은 드라마적 쾌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압력솥이란 밀폐된 용기 안에서 수증기 압력을 높여 일반 조리 온도보다 빠르게 식재료를 익히는 도구로, 삼계탕처럼 장시간 우려야 하는 탕류에 특히 효과적입니다. 장영실의 후손 장춘생이 이를 제작한다는 설정은 조선의 과학 전통을 요리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나름 영리했습니다.
다만 이 에피소드가 국뽕 서사로 흐른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려웠습니다. 조선이 항상 이기고, 명나라 숙수들은 인상적으로 등장했다가 결국 지형의 배경 장치로만 소비되는 구조는 일반적으로 이런 경합 장면에서 서사적 균형을 잃기 쉬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제 경험상 경합 드라마에서 상대방의 요리에도 진정성을 부여할 때 주인공의 승리가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데, 이 드라마는 그 균형이 살짝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음식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과 명나라의 식문화 충돌은 실제 역사에서도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결론
타임슬립이라는 익숙한 공식을 들고 왔길래 처음엔 큰 기대 없이 킬링타임용으로 틀었다. 근데 어느새 정주행하고 있더라. 지형이 낯선 조선 땅에 뚝 떨어져서 요리 하나로 살아남는 과정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됐다. 이 드라마의 진짜 강점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요리가 그냥 예쁜 볼거리가 아니라 지형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 위기가 올 때마다 그녀는 매번 칼과 불로 돌파했고, 그래서 그녀가 왜 이 낯선 시대에서도 살아남는지가 자연스럽게 납득이 됐다. 대왕대비 시험에서 된장 파스타로 마음을 여는 장면, 명나라 사신단과의 요리 대결에서 통쾌하게 이겨나가는 장면들은 손에 땀을 쥐고 봤다.
연이군이라는 캐릭터도 처음엔 그냥 전형적인 폭군이겠거니 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알게 되면서 시선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형 덕분에 조금씩 사람다워지는 걸 지켜보면서 나도 같이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둘의 관계가 억지스럽게 붙는 게 아니라 서서히 쌓여가는 방식이라 몰입이 잘 됐다.
다만 후반부, 특히 반정이 터지는 순간부터는 정신없이 몰아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을 좀 더 음미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급하게 사건 위주로 흘러가서 아쉬웠다. 강수건 같은 악역도 동기가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려졌다면 훨씬 몰입도가 높았을 것 같고, 망운록이라는 매개체의 정체가 끝내 명확히 풀리지 않은 채 로맨스로 마무리된 것도 두고두고 아쉬운 지점이다.
그래도 마지막에 현대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은 따뜻해서, 보고 나서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몇몇 아쉬운 지점들이 있긴 했지만, 로맨스와 사극, 요리라는 세 가지 장르를 이만큼 균형 있게 버무린 작품도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또 이런 느낌의 드라마가 나오면 망설임 없이 챙겨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