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퍼물이라 보기엔 너무 진지했던 전반부케이퍼물이란 사기, 절도, 작전 등 범죄를 주인공 시점에서 통쾌하게 그려내는 장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나쁜 사람을 더 나쁜 방식으로 응징하는 이야기죠. 드라마 초반은 이 공식에 충실합니다. 사채업의 전설이라 불리는 상필을 상대로, 전국이 베네수엘라 화폐 개혁을 이용한 돈세탁 사기를 설계해 60억 원을 빼내는 장면은 전형적인 케이퍼 서사입니다. 제가 이 초반부에서 흥미를 느낀 건 사기 수법 자체보다도, 전국이라는 인물이 가진 냉정함이었습니다. 목표가 생기면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움직이는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강력반 형사 미영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감정이 개입되기 시작합니다. 전국과 미영의 관계는 처음엔 사기꾼과 형사라는 뻔한 구도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두..
우정 서사를 해부하면 보이는 것들드라마를 분석적으로 뜯어보면, '서른, 아홉'이 선택한 우정 서사의 문법이 꽤 영리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미조, 찬영, 주희 세 사람은 열여덟 살에 처음 만나 스무 해를 함께했습니다. 그 세월의 밀도를 드라마는 대사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찬영이 시한부 판정을 받고 즉시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심리, 그걸 미조가 눈치채면서도 직접 캐묻지 않고 기다리는 방식. 이런 디테일이 쌓이면서 "이 친구들은 진짜 오래된 사이구나"라는 신뢰가 생깁니다. 일곱 살에 입양된 미조는 피부과 원장으로 성장했고, 선우라는 인물과 만나면서 입양이라는 공통 경험을 다시 꺼내 들게 됩니다. 여기서 드라마가 반복적으로 던지는 메시지가 있는데, 혈연, 즉 핏줄로 연결된 관계만이 가족이 아니라는..
직장인으로서의 변호사: 이 드라마가 선택한 현실9년 차 어소 변호사가 개업 대신 월급쟁이를 택한 이유로 "시키는 게 제일 마음 편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어소 변호사라는건 처음 들어봤는데 궁금해서 찾아보니, 로펌에 고용된 소속 변호사를 뜻하며, 파트너 변호사처럼 수익을 배분받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월급을 받고 일하는 구조라고 나왔습니다. 이 한 문장이 드라마 전체의 결을 설명해 준 것 같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작품이 영웅적 법조인 서사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세무사 폭행 사건, 보이스피싱 국선 변호, 편의점 절도처럼 뉴스 헤드라인에도 안 나올 사건들이 메인 서사 옆을 채웁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소비되는 대형 로펌의 권모술수 대신, 진짜 '월급 받는 변호사'의 ..
꿈과 현실 사이, 고겸이 건드린 질문 드라마 속 고겸은 26살에 배우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대학도 중간에 그만두고, 영화계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단역부터 시작하죠. 그러다 평론가(critic)로 방향을 틀어 잡지사 전속 계약까지 맺고, 신랄한 글로 인지도를 쌓아 나갑니다. 여기서 평론가란 단순히 영화 감상을 적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의 미학적·서사적 가치를 분석하고 공론장에 의견을 제시하는 직업입니다. 저도 이 장면을 보면서 무언가를 하나 딱 정하고 그 방향으로만 파고드는 삶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다시 느꼈습니다.반면 무비는 조금 다릅니다. 영화감독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영화적 언어(cinematic language)에 노출된 사람입니다. 영화적 언어란 카메라 앵글, 편집 리듬, 색..
종말 이후의 세계관,택배기사의 의미드라마 속 세계는 새로운 자원인 '옥시늄(Oxynium)'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옥시늄이란 혜성 충돌 이후 희귀하게 생성된 광물로, 이것을 가공해야만 인공 산소를 만들 수 있는 물질입니다. 쉽게 말해 이 세계에서 옥시늄은 곧 생명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반·특별·코어, 세 등급으로 철저하게 분류됩니다.등급 밖으로 밀려난 난민들에게는 QR코드조차 없습니다. QR코드란 이 세계에서 신분과 배급 자격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게 없으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 난민들에게 유일하게 닿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택배기사입니다. 개인 이름 대신 5-8, 5-7 같은 일련번호로 불리는 이 사람들이, 모래폭풍을 뚫고 헌터들과 맞서 싸우며 산소와 생..
복수극, 감정이 앞서면 끝까지 갈 수 있을까드라마는 지우의 아버지가 정체불명의 킬러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우는 범인을 찾겠다는 결심 하나로 조직 보스 최무진을 찾아갑니다. 복수심(vengeance motiv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복수심이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통제감을 되찾으려는 심리적 충동을 의미합니다.솔직히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제 가족이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저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사건이 제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정말 사소한 일이었는데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저는 상대에게 따지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고, 가족이 먼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