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 '윤선아'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은오는 양양에서 '윤선아'라는 가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미스터리 설정인 줄 알았는데, 직접 겪어보니, 정확히는 끝까지 보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절박한 자기 부정이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은오는 면접 현장에서 민수의 불륜을 목격했고, 그 때문에 입사가 취소됩니다. '평범하다'는 이유로 모든 걸 잃은 충격이 그녀를 양양으로 내몰았고, 그곳에서 그녀는 '이은오'라는 이름을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이걸 드라마 용어로 설명하자면 일종의 페르소나(persona) 교체인데, 여기서 페르소나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인에게 보여주는 자아의 가면을 의미합니다.은오의 경우는 가면을 쓴 게 아니라 원래 얼굴을 지우려 한 것에 가까웠던것 같습니다.재원을 만난 것도 그..
타임리프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닌 이유 - 선택의 결과제가 직접 정주행해봤는데, 이 드라마의 타임리프(Time Leap) 설정이 여느 작품과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여기서 타임리프란 특정 인물이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의식이나 몸 자체가 이동하는 서사 장치로, 흔히 "과거를 고쳐서 더 나은 현재를 만든다"는 판타지적 욕망을 자극하는 소재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욕망을 정직하게 채워주는 척하다가, 결국 "바꾼 현재가 반드시 더 나은 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었습니다.주인공 차주혁이 과거로 돌아가 첫사랑 해원을 선택하자, 집은 넓어지고 게임은 마음껏 할 수 있는 삶이 펼쳐집니다. 처음에는 "이게 맞는 삶이었구나"처럼 보이지만, 해원이 주혁의 부모님을 탐탁지 않아 하고 직장 내 문제에서..
드라마가 건드린 감정의 정체(감정이입)일반적으로 드라마는 픽션이니까 감동은 받아도 현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블루스는 좀 달랐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감정이입(empathy)입니다. 여기서 감정이입이란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심리적 반응을 말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감 반응(empathic response)이라고도 부르는데, 단순히 "불쌍하다"는 동정과는 다르게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내면에서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결핍이 있습니다. 영옥은 서울에서 내려와 제주 해녀로 살면서 주변의 시선을 감수합니..
20년 무명 감독, 그 끝에서 시나리오를 다시 쓰다드라마 속 황동만은 40대 무직 남성입니다. 영화감독이라는 직함이 있지만, 그 직함은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탈락의 이유가 될 뿐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감독'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권위이고,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현실이 드라마적 과장이 아니라 실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황동만은 감정 상태를 단체 채팅방에 매일 올리며 존재감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를 무시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황동만이 안쓰럽기도 했고, 동시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 방식이 사람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드라..
뺑소니 복수극, 사건의 구조가 치밀하다드라마의 시작은 꽤 잔인합니다. 1부 리그 입단이 확정된 날, 꿈의 정점에서 뺑소니를 당하는 황준현의 이야기는 단순한 '불운'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사고를 낸 쪽은 최선그룹의 쌍둥이 후계자 강재경과 강재성이고, 이들은 블랙박스 영상을 통해 아버지의 비자금이 드러날까 봐 증거를 인멸합니다.여기서 '비자금'이란 기업이 공식 회계 장부에 기록하지 않은 채 비밀리에 조성하고 운용하는 자금을 의미합니다. 주로 탈세, 뇌물, 정치자금 공여 등에 활용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명백한 범죄 행위에 해당합니다. 드라마 속 쌍둥이들이 사건을 덮으려 한 핵심 이유가 바로 이 비자금 노출 위험이었다는 점이 이 복수극의 출발점을 한층 탄탄하게 만들어 줍니다.준현은 요양보호사가 우연히 녹화한 ..
닭 모가지를 떠올리는 아이, 반사회적 인격 장애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주인공 끔은 또래 아이들이 인형 놀이에 열중할 때, 닭 모가지를 머릿속에 그리는 아이였습니다. 드라마는 이걸 반사회적 인격 장애로 설명합니다.그런데 드라마는 이 캐릭터를 단순히 어둡게만 그리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자란 끔은, 냉소적이면서도 나름의 논리를 가진 인물로 성장합니다. 인간은 결국 타락한다는 그의 세계관이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엔진이 됩니다.제가 이 부분에서 공감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세상이 내 편인 것 같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야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끔이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행동하는 방식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습니다.두바이에서 만난 램프의 요정, 이블리스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