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물이 교복을 입는 순간 - 장르혼합의 매력과 균열요즘 드라마 중에 장르를 한 가지로 못 박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최근 들어 장르 혼합(genre blending)이라고 부르는 방식, 즉 서로 다른 장르의 코드와 문법을 한 작품 안에 의도적으로 뒤섞는 전략이 K-드라마의 주된 흐름이 됐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언더커버 하이스쿨 1화는 그 방식의 가장 극단적인 예시처럼 보였습니다.직접 첫 화를 보면서 느낀 건, 도입부의 밀도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에 총격이 가해지고 유물 조사 중 총알 파편이 발견되는 장면은 분명히 묵직한 역사 첩보극의 문법입니다. 거기에 민족 반역자인 초대 이사장 서백문이 고종 황제의 비자금을 횡령했다는 설정까지 얹히면서, 드..
세무조사라는 소재, 왜 지금 통했나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데, 이 드라마가 택한 세무조사라는 틀은 생각보다 훨씬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무조사는 딱딱하고 숫자 나열에 가까울 거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실제로 보고 나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극 초반, 황동주는 양영순 회장의 자택을 수색하다 10억 규모의 비자금을 찾지 못해 난관에 봉착합니다. 이때 그가 포착한 단서는 2억 원 상당의 산소 튜브 구매 내역과 현금으로 처리된 인테리어 비용이었습니다. 여기서 비자금(秘資金)이란 기업이나 개인이 세금 신고를 피하기 위해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은닉한 현금을 의미합니다. 황동주는 이 단서만으로 수도관 속에 숨겨진 현금 뭉치를 정확히 찾아냈고, 시청자는 그 논리 전개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
세계관: 천사도 인간처럼 아프다는 설정트웰브의 세계관은 태초의 신들이 악귀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12명의 천사를 지상으로 내려보냈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들은 악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지옥문을 봉인한 뒤, 현재는 인간의 모습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여기서 트웰브가 기존 신화 드라마와 가장 크게 갈리는 지점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신이나 천사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살아간다고 해도, 드라마 속에서는 그 존재들이 아픔이나 질병 없이 그냥 인간인 '형태'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제가 봐왔던 수많은 신화 판타지 드라마가 딱 그 패턴이었습니다.그런데 트웰브는 다릅니다. 천사들이 약을 먹어야 하고, 몸이 이상해지고, 심리적 고통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리더 격인 태산이..
풍요의 끝에서 닥친 IMF 외환위기, 그 시대의 민낯혹시 '오렌지족'이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1990년대 중반, 압구정을 중심으로 부유층 자녀들이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과소비를 일삼던 청년 문화를 부르던 말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던 고도 성장기가 만들어낸 부작용이었죠. 드라마 속 강태풍도 그 오렌지족 중 하나였습니다. 겉으로는 날라리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인정 하나를 원했던 청년이었습니다.그런데 이 풍요가 얼마나 허망하게 끝났는지, 1997년 숫자 하나가 모든 걸 설명해줍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습니다. 여기서 IMF란 International Monetary Fund, 즉 국제통화기금으로, 특정 국가가 외채를 갚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
귀신 빙의가 만들어낸 주방의 혼란드라마에서 나봉선은 원래 주방에서 늘 혼나는 존재입니다. 소스를 엉망으로 만들어 불이 날 뻔하고, 졸다가 걸리고, 동료들과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킵니다. 셰프 강선우는 "기본이 안 되어 있다"며 강하게 질책하고, 수셰프 강민수는 "내가 10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며 책임을 미룹니다. 보는 입장에서도 답답할 정도인데, 거기에 신순애가 빙의되면서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빙의(憑依)란 다른 존재의 영이나 인격이 특정인의 몸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내 몸인데 내가 조종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드라마에서 신순애가 나봉선의 몸을 빌려 행동하면서, 나봉선이 평소에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불합리한 손님을 정면으..
불륜심리: 설렘이라는 감정의 함정드라마 속 민환과 수민의 불륜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지원이 시한부 판정을 받아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동안, 민환은 아픈 아내를 외면하고 수민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게 허구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건, 제가 지인에게서 들은 실제 불륜 사례들과 구조가 거의 똑같았기 때문입니다.불륜심리학에서 말하는 '친밀감 격차(Intimacy Gap)'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친밀감 격차란 기존 파트너와의 정서적 연결이 약해지면서 외부에서 새로운 연결을 찾으려는 심리적 공백 상태를 의미합니다. 민환이 아픈 지원을 돌보기는커녕 외면한 것, 그리고 늘 곁에 있던 수민과 접촉이 늘어난 것이 이 패턴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제가 경험상 느낀 건, 불륜은 대부분 '작은 설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