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으로서의 변호사: 이 드라마가 선택한 현실9년 차 어소 변호사가 개업 대신 월급쟁이를 택한 이유로 "시키는 게 제일 마음 편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어소 변호사라는건 처음 들어봤는데 궁금해서 찾아보니, 로펌에 고용된 소속 변호사를 뜻하며, 파트너 변호사처럼 수익을 배분받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월급을 받고 일하는 구조라고 나왔습니다. 이 한 문장이 드라마 전체의 결을 설명해 준 것 같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작품이 영웅적 법조인 서사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세무사 폭행 사건, 보이스피싱 국선 변호, 편의점 절도처럼 뉴스 헤드라인에도 안 나올 사건들이 메인 서사 옆을 채웁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소비되는 대형 로펌의 권모술수 대신, 진짜 '월급 받는 변호사'의 ..
이지안이라는 인물,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을까이지안을 단순히 '불쌍한 캐릭터'로 소비하는 드라마였다면, 저는 반쯤 보다 껐을 겁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안은 도청을 했고, 거짓말을 했고, 전과도 있습니다. 그 모든 사실이 드라마 후반부에 차례로 드러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전과라는 설정은 시청자 입장에서 순간적으로 멈칫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박동훈이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저는 이게 값싼 동정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이 대사는 캐릭터를 미화하는 게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는 것과 행동을 용납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이지안의 어머니는 빚을 잔뜩 남기고 도망쳤고, 이지안은 상속포기 제도를 몰라 그 빚을 고스란히..
타임슬립이라는 익숙한 틀, 그런데 요리가 다르게 썼다일반적으로 타임슬립 드라마는 현대인이 과거에서 현대 지식을 활용해 위기를 돌파하는 공식을 따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도 그 공식을 기대했는데, 실제로 봤더니 방향이 조금 달랐습니다.주인공 지형은 프랑스 요리대회 우승 경력을 가진 현직 셰프로, 비행 중 계기 이상으로 조선 시대에 불시착합니다. 이후 연이군의 사냥터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궁중 요리사로 배정되는 흐름인데, 여기서 요리가 단순한 '먹방 장치'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이 제가 직접 보며 느낀 가장 큰 차이였습니다.예를 들어 지형이 조선 시대 고기를 부드럽게 조리하기 위해 활용한 수비드 기법이 등장합니다. 지형이 이 기법을 조선 환경에 맞게 변형해서 쓰는 장면은 캐릭터의 전문성을 설명하는..
자존감 서사 - 이 드라마가 진짜 말하려는 것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로맨스가 아니었습니다. 독경석이 강미래에게 "찌그러진 마인드를 수술하라"고 했던 그 대사였어요. 처음 들었을 땐 좀 차갑게 느껴졌는데, 곱씹을수록 이게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강미래는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꿨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주변의 시선을 확인하고, 자신이 어울리는지를 의심하고, 고백을 받고도 "우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부합니다. 강미래는 얼굴은 바꿨지만 이 내면의 잣대는 그대로 갖고 있었던 것 이었습니다.이걸 드라마가 꽤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중학교 시절 왕따와 따돌림으로 형성된 트라우마가 대학 생활 내내 강미래의 행동 패턴 전반을 지배합니다. 김찬우에게 무례한 접근을 받아도 ..
스릴러의 문법, 이번 화가 보여준 것들저는 이번 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드라마가 스릴러 장르의 공식을 꽤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화에서 그 시계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모래시계입니다. 새윤이 갇힌 밀실 안에서 모래시계가 조금씩 비워져 가는 장면을 볼 때마다, 제가 직접 그 방 안에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습니다. 옆방 인질의 모래시계가 다 쏟아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이 시간 제한이 단순한 연출 장치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줬습니다.노마니의 행동 패턴도 주목할 만했습니다.드라마 속 노마니는 감금 후 36~38시간 내에 인질을 다치게하는 패턴을 6년 이상 반복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소름 돋는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노마니는 인질을 감금해두고, 정작 자..
트라우마를 가진 두 사람이 같은 현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문수와 강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고를 견디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문수는 아역 시절 스타였던 동생 연수를 잃고, 사고 당시의 기억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해리성 기억상실인 문수가 사고 현장 근처에 가거나 고층 빌딩에 올라가는 것조차 못 하는 장면들이 연기적으로 과장된 게 아니라 실제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으로 읽혔습니다.강두는 반대입니다. 그는 기억을 너무 선명하게 갖고 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 소년 최성제가 그 후 어떻게 됐는지까지 알고 있고, 그 죄책감이 12년 내내 그를 짓눌러왔습니다. 아버지는 청유건설 하청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강두 본인은 다리에 흉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