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이라는 설정, 뻔하지 않았던 이유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결박당해 발견된 여자. 이름도, 과거도 전부 사라진 상태입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기억상실 로맨스의 출발선처럼 보였고, 제가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다른 건, 기억을 잃은 이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서울중앙지검 반부패 수사부 검사로서의 수사 활동과 직결된다는 점입니다.고지원은 주시장과 백상일 회장의 택지 개발 비리를 쫓다가 증거물인 시계를 빼앗기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악역에게 제거 대상이 된 검사라는 설정이 로맨스에 긴장감을 제대로 얹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장태하라는 인물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는 국가대표 복싱 선수 출신이었지만, 할머니 병원비 문제로 백상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폭 생활을 시..
직장인으로서의 변호사: 이 드라마가 선택한 현실9년 차 어소 변호사가 개업 대신 월급쟁이를 택한 이유로 "시키는 게 제일 마음 편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어소 변호사라는건 처음 들어봤는데 궁금해서 찾아보니, 로펌에 고용된 소속 변호사를 뜻하며, 파트너 변호사처럼 수익을 배분받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월급을 받고 일하는 구조라고 나왔습니다. 이 한 문장이 드라마 전체의 결을 설명해 준 것 같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작품이 영웅적 법조인 서사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세무사 폭행 사건, 보이스피싱 국선 변호, 편의점 절도처럼 뉴스 헤드라인에도 안 나올 사건들이 메인 서사 옆을 채웁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소비되는 대형 로펌의 권모술수 대신, 진짜 '월급 받는 변호사'의 ..
이지안이라는 인물,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을까이지안을 단순히 '불쌍한 캐릭터'로 소비하는 드라마였다면, 저는 반쯤 보다 껐을 겁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안은 도청을 했고, 거짓말을 했고, 전과도 있습니다. 그 모든 사실이 드라마 후반부에 차례로 드러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전과라는 설정은 시청자 입장에서 순간적으로 멈칫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박동훈이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저는 이게 값싼 동정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이 대사는 캐릭터를 미화하는 게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는 것과 행동을 용납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이지안의 어머니는 빚을 잔뜩 남기고 도망쳤고, 이지안은 상속포기 제도를 몰라 그 빚을 고스란히..
타임슬립이라는 익숙한 틀, 그런데 요리가 다르게 썼다일반적으로 타임슬립 드라마는 현대인이 과거에서 현대 지식을 활용해 위기를 돌파하는 공식을 따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도 그 공식을 기대했는데, 실제로 봤더니 방향이 조금 달랐습니다.주인공 지형은 프랑스 요리대회 우승 경력을 가진 현직 셰프로, 비행 중 계기 이상으로 조선 시대에 불시착합니다. 이후 연이군의 사냥터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궁중 요리사로 배정되는 흐름인데, 여기서 요리가 단순한 '먹방 장치'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이 제가 직접 보며 느낀 가장 큰 차이였습니다.예를 들어 지형이 조선 시대 고기를 부드럽게 조리하기 위해 활용한 수비드 기법이 등장합니다. 지형이 이 기법을 조선 환경에 맞게 변형해서 쓰는 장면은 캐릭터의 전문성을 설명하는..
성공의 기준 - 누구의 이야기로 쓰인 성공인가이번 화는 유럽 국제 영화제 황금 파도상 수상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황금 파도상은 극 중 이한우 감독이 단편 영화 'Wondering'으로 수상한 권위 있는 상으로, 수상 소감에서 그는 18살 시절 꿈을 심어준 첫사랑에게 모든 영광을 바친다고 말했습니다. 그 장면만 놓고 보면 충분히 낭만적입니다.그런데 제가 직접 그 장면을 반복해서 보면서 든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10년 넘게 각자의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약속 지켰다, 이제 너 보러 갈게"라는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 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일방적인 선언일 수 있거든요. 로맨틱하다기보다 일종의 감정적 침범처럼 느껴진 이유가 그겁니다.여기서 뮤즈(Muse)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뮤즈..
담예진 캐릭터 - 화려한 수치 뒤에 숨은 공백제가 드라마를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건 "이 인물을 믿을 수 있는가"입니다. 담예진은 1분당 판매액 1억 원, 누적 판매액 1조 원이라는 숫자를 달고 등장합니다. 숫자 자체는 과장이지만, 그 과장이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은 꽤 효율적이었습니다. 홈쇼핑 업계에서 쇼호스트의 성과를 측정하는 핵심 지표는 시간당 판매 전환율(CVR, Conversion Rate)인데, 여기서 CVR이란 방송을 시청한 사람 중 실제로 구매까지 이어진 비율을 의미합니다. 예진이 최고층 빌딩 외부에서 제품을 직접 시연해 방송 중 전 상품을 매진시키는 장면은, 이 CVR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쇼호스트의 역량을 드라마적으로 압축해 보여준 셈입니다.그런데 제가 더 눈여겨본 건 그 다음입니다..